구역공과&쉴만한 물가
2019년 5월 넷째 주 구역공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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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용서 -마 18:2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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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배/ 순/ 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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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 한 주간 읽을 성경 말씀: 마태복음 18-21장 |
환영/ [지난주 말씀 나눔] 어릴 적 큰 잘못을 했던 기억이 있는가? 찬송/ 266(200) 기도/ 구역원 중 말씀속으로/ 헌금찬송/ 269(211) 주기도문/ 다같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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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나눔] 지난 주 말씀 가운데 혹은 살면서 깨달은 것, 회개, 감사, 결단한 것들을 함께 나누어 봅시다. ⇒ 거짓인가? 진리인가?(갈 5:7-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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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이해]
마태복음 18장은 일명 교회에 대한 설교이다. 1) 천국(교회)에서 큰 자는 자신을 낮추고, 작은 자를 영접하며, 죄를 두려워하는 자다(18:1-10). 2) 천국(교회)은 한 영혼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애쓰며, 기도하는 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진다(11-20). 3) 천국(교회)는 용서의 공동체이다. 그중에 용서에 대해 다루어보려고 한다.
[말씀 깨닫기]
용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장 감당하기 힘든 덕목이다. 내게 깊은 상처를 입힌 자를 용서하기란 너무나도 어렵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종’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우리에게 용서의 삶을 요구하신다. 용서에 이르기 위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1. 용서는 천국의 가치이다_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묻는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21) 18장에 다 주님의 말씀인데, 유일하게 베드로가 끼어들어 말하고 있다.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늘 13명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그 생활이 부대꼈을 수도 있다. 마음에 안 맞고, 상처 입고, 그런 일들이 발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지침을 주신다(15-17). 보통 유대교 랍비들은 3번의 용서를 가르쳤다. 그러니 베드로가 크게 써서 일곱 번 용서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한정 용서를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천국은 마치”라는 비유를 시작하신다. 그 비유가 ‘은혜를 모르는 종’의 비유이며, 그 비유의 핵심은 용서이다. 그러니 주님이 용서가 천국의 가치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용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선택사항이다. 왜냐하면, 용서가 천국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축구 선수에게 축구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이 아니다. 축구 선수가 축구를 안 하면, 더 이상 축구 선수가 아니다. 그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용서를 안 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 용서가 천국의 가치라는 말에 담긴 의미이다.
질문] 예수님이 몇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는가? (22절)
2. 하나님의 용서를 기억하라_ 옛날 한 임금에게 한 신하가 일만 달란트 빚을 졌다. 한 달란트가 노동자 6000일의 임금이다. 그러니 일만 달란트는 노동자의 약 20만 년의 임금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다. 당시 로마가 팔레스틴에서 거둔 세금 총액이 800달란트였다고 하니, 일만달란트는 상상할 수도 없는 큰 금액이다. 그런데 임금이 그 신하를 불쌍히 여긴다.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27). 신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새로운 삶을 얻은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용서가 이와 같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임금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독생자 외아들을 주시면서까지 우리를 용서하셨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셨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빚을 탕감해 주셨는가? 단 하나 우리가 불쌍해서, 탕감해 주셨다. 베드로는 인간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용서의 한계를 7번으로 봤다. 어떻게 같은 일을 7번이나 용서해 줄 수 있겠는가? 100만원 안 갚고 도망간 것은 그래도 용서할 수 있다. 그런데 10억을 꾸고 도망간 것을 용서할 수 있는가? 용서할 수 없다. 이처럼 인간의 용서에는 한계가 있고, 선이 있다. 내가 용서할 수 있는 사람과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용서는 한계가 없다. 무한대의 용서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용서를 베푸셨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 십자가의 용서를 늘 기억해야 용서할 수 있다.
질문]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은 자를 주인이 어떻게 하는가? (34절)
3.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반드시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_ 본문의 종은 엄청난 빚을 탕감받았다. 그런데 나가자마자, 자신에게 100일치 품삯을 빚진 자를 만난다. 멱살을 잡고, 경찰서로 끌고 가서, 감옥에 집어넣는다(30). 그걸 본 동료들이 그 사람의 행동을 주인에게 아뢴다. 주인은 노발대발해서, 그를 잡아들여 옥에 가둔다. 그때 주인의 말이 우리를 향한 이 비유의 메시지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33)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경험했으면, 동료(이웃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 말처럼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이다. 오늘날 이기적인 우리는 우리가 받은 용서와 우리가 해야 할 용서를 분리해서 생각한다. 그게 세상의 방식이다. 내가 받은 은혜와 내가 베풀어야 할 은혜를 분리하는 성향이 우리 안에 내재 되어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의 용서를 경험한 자라면 마땅히 이웃을 용서해야 함을 요구하신다. 십자가의 용서는 우리가 해야 할 그 어떤 용서와도 비교가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생명을 빚진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 사소한 것에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 모습을 십자가 앞에 내 던지고, 새로운 피조물로 용서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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